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 (문단 편집) === 쇠퇴 원인 === [[열대]] 지방에까지 진출했던 몽골 제국이 분열 이후 열대와 [[온대기후|온대]] [[농경]] 지대를 상실하고 급속도로 [[유목민족]] 중심의 [[초원]] 지대로 밀어올려진 건 근본적으로 몽골 제국의 지배 체제 자체에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몽골 제국이 오랜 기간 지속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몽골의 자체적 [[소프트파워|문화적 역량]]의 부족과 경제적 역량의 부족이었다고 봐도 되는데, 유목민족 특유의 적은 [[인구]]가 저 두 요소를 야기함과 동시에 심화하여 몽골 제국의 존속 가능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줬다. [[칭기즈 칸]]이 [[정복]] 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의 몽골 인구가 80만 내외로 추정되는데, 이는 1억 3600만에 달하던 [[중화제국|중국]]([[금나라|금]]+[[남송]])은 물론, 350만~450만 정도로 추정되는 [[고려]], 450만~800만 사이로 추정되는 [[키예프 루스]]에 비해서도 훨씬 적은 인구였다. 즉, 고려의 1/3도 안 되는 인구로 그 넓은 [[영토]]와 엄청난 피지배 인구를 거느린 대제국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몽골의 침공으로 중국, 고려, 루스, [[페르시아]], [[아랍]] 등의 인구가 크게 줄었고, [[몽골인]]은 통일과 피지배 민족에 대한 착취로 어느 정도 늘기는 했으나, 여전히 인구에서 몽골인은 피지배 민족들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다. 몽골 제국은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지만 [[내전]]을 치르면서 각 지역별로 분열하게 되었고, 초원에서 [[가축]]을 치던 유목민이 인구의 대부분이었던 몽골인들에게는 [[중국인]], [[한민족|고려인]], [[아랍인]], [[투르크인]], [[쿠르드인]], [[페르시아인]], [[슬라브인]] 등 훨씬 높은 문화적 수준을 지닌 피지배 정주 민족들을 동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문화적 역량도 없었다. 인구가 많다면 [[혼혈]] 정책을 펼쳐 억지로 밀고 들어가 혈통 의식이라도 심을 수 있었겠지만, 인구에서도 피지배 민족들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혼혈 정책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적은 인구와 낮은 문화적 소양 때문에 몽골인들이 기존 농경 정주 민족을 다스리던 유목민 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지배 민족들에게 동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고, [[원나라|원]]이나 여타 다른 몽골계 국가들에서 피지배 민족에 동화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피지배 민족들을 몽골에 동화시키려 했으나 결국 이들을 동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피지배 민족들의 [[반란]]으로 점점 쫓겨나며 쇠락하였다. 오히려 [[몽골]]로 돌아가지 못한/않은 몽골인들은 높은 문화적 역량과 많은 인구를 지니고 있던 [[중국]], [[한국]], [[튀르키예]], [[아랍]], [[이란]],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 동화되었다. 그나마 [[티무르 제국|티무르]]나 [[무굴 제국|무굴]]의 경우를 봤을 때 몽골 제국의 지배층과 통혼하던 [[중앙아시아]] 및 그 주변 지역의 유목민족계 지배층들 중 일부에게는 [[18세기]] 무렵까지 몽골인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하나, 이들의 몽골 계승 주장은 사실상 통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이들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는 문화적/혈연적 정체성은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나마도 18세기 이후 각지의 민족 의식 혹은 국가 의식이 강화되며 사라지거나 [[대영제국|영국]], [[러시아 제국|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으며 완전히 사라졌다.[* 사실 이 부분에서 티무르, 무굴 등의 몽골 제국 계승 의식이 지배층에만 국한되며 피지배층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몽골 제국의 후계를 자처하며 [[인도]]를 통치하던 [[무굴 제국]]이 [[대영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무굴 제국 정부와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반란]]까지 일으키던 [[힌두교|힌두계]]/[[시크교|시크계]]/[[자이나교|자이나계]] [[인도인]]들은 [[관용]] 정책을 펴던 [[악바르 대제]]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 걸 제외하면 무굴 제국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무굴 제국을 사실상 북방 [[이민족]] 왕조 지배 기간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슬람|무굴 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무굴 제국에 대해 좋게 평가하는 [[파키스탄인]]들도 자신들과 몽골이 별 다른 관계가 있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때문에 몽골 제국은 그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각지에 몽골인들을 보내 살게했지만 대부분 소규모 지배층 및 중간 계층에 불과했고, 이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던 제국의 지배력이 사라지고 자신들이 피지배 민족이 되자 너무나도 쉽게 지배자가 된 압도적 다수의 피지배민들에게 혈연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 둘 다에서 동화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몽골인의 후손으로서 자각과 정체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몽골 제국의 [[본토]]이자 [[카마그 몽골|칭키즈칸 이전 시대 몽골]]의 영역인 [[외몽골]]과 [[내몽골]] 출신의 몽골인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더해서 몽골 제국은 자체적 인구와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피지배민들에게 다양한 [[세금]]을 엄청나게 높은 [[세율]]로 징수했는데, 복속 이전보다 훨씬 높은 세금을 부담해야 했던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몽골 제국이 피지배 민족들의 반발을 감수하고라도 엄청난 세금을 물렸던 이유가 있는데, [[농업]]이 가장 큰 부가가치를 생산하던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몽골인들의 본거지인 몽골 지역의 [[토지]] 중 대부분은 [[농경]]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몽골의 자체적 경제 역량으로는 대제국을 경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거기다 이런 자연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몽골은 자체적으로 국가 경제를 경영하며 [[국력]]을 유지할 수준의 인구를 확보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몽골은 빠른 [[기동력]]과 [[궁기병|기마궁병]]의 전술적 우위를 이용하여 정주 농경민들의 국가들을 정복한 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 역량을 피지배 민족들에게 의지하는 사실상 [[약탈]] 경제 혹은 [[기생충|기생]] 경제 체제를 구성했다. 더 나아가 정복지의 [[치안]] 유지 능력은 물론 [[군사력]]조차도[* 몽골인 인구가 적어 몽골인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동원하기가 어려웠고, 때문에 몽골 제국은 전성기 시절부터 [[중국인]], [[한민족|고려인]], [[아랍인]] 등 피지배 정주민들을 [[징병]]하거나 [[용병]]으로 [[고용]]하여 써야 했다.] 사실상 이렇게 정복하여 지배한 정주 농경민 피지배 민족들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몽골 제국은 대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자금을 이들 피지배 민족들에게서 세금 및 [[조공]]으로 받아내거나 약탈해온 물자들과 농경 민족들 간 [[교역]]을 독점하며 챙긴 마진 이익으로 충당했다. 이렇기 때문에 정주 민족들이 몽골식 기마궁병에 익숙해지면서 대응 전략을 세우게 되면서 [[칭기즈 칸]] 이래의 몽골의 전술이 파훼되고, 더이상 몽골식 기마궁병이 전술적 우위를 지니지 못하게 되어 정주 민족들을 빠른 시간 안에 제압할 수 없게 되자 몽골 제국과 반기를 든 피지배 민족 간의 [[전쟁]]은 [[지구전]] 겸 [[소모전]]이 되었다. 자체적인 인구와 경제력이 부족한 데다 각지의 반란 및 외침과 내분이 겹친 탓에 피지배 민족에 대한 동원 능력마저 떨어져 이런 식의 전쟁에 대한 지속 능력이 부족했던 몽골인들은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피지배 민족을 차래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가령 몽골의 주요 정복지 중 가장 마지막에 복속된 [[남송]] 지역의 경우 저항이 워낙 심한데다 인구도 많아서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행정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렇게 되자 원나라 정부가 아니라 한족 지주들과 한족 출신 관리들의 힘으로 사회가 돌아가게 되었고 원나라가 내분으로 쇠약해지자 이 지역은 홍건적과 반란군이 들끓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피지배 민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하나 둘 상실하기 시작하자 몽골 제국의 경제 붕괴에 더욱더 속도가 붙어 빠르게 제국이 무너지게 됐다.[* 대표적으로 정복 초기부터 저항이 심했던 남송 지역은 농민 반란군들을 이간질하여 서로 싸우게 하는 식으로 제국의 붕괴를 막는 소위 뗌빵을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이 선택은 원나라에게 있어서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는데 '''[[화포|무장 상태가]] [[주원장|농민이 아닌 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대포와 전함으로 무장한 자칭 농민 반란군--] 몽골 제국의 분열의 이유 중 가장 크게 꼽는 것이 바로 몽골의 상속 풍습이다. 몽골은 장자 상속제가 아닌 분할 상속제를 시행했는데[* [[중세]] 당시에는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장자 상속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분할 상속이 대세였다. 중세의 게르만 관습법에 의한 국가들의 빈번한 분열, 특히 프랑크 왕국의 서, 동, 중 프랑크의 분열이 대표제인 예라 하겠다. [[크루세이더 킹즈]]에서 유목 민족으로 장자 상속제를 만들기를 체험해보자. 답답하다.] 장자 상속제였다면 분배를 크게 받지 못한 자도 물론 불만이야 있겠지만 "그래 뭐... 그게 원칙이니까" 하고 넘길 수 있었겠으나, 몽골은 모두 정확히 분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네가 더 많이 가졌잖아!!"하며 내부 갈등이 심하였다.[* 아래 뿐만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이랬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병사를 소집할 수 있는 지배층에서도 내부 갈등이 심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15세기에 [[상속법]]을 고치기는 하였으나 풍습은 쉽게 바꿀 수 있는것이 아니라 몽골 제국의 부흥에 큰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이 위대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급성장할 수 있지만 그 지도자 사후 급속도로 분열과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어 버린 큰 이유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